[수필]가능성의 맛이었나 봐. 기회의 맛이었을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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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쌉싸름한
[디저트] 6회


애플 크럼블 
by 무구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은 기억인데도 가끔 밀려오는 그리움은 꽤 거대해서 당혹스러울 때가 있어. 내가 그렇게나 사랑했었나, 그렇게나 행복했었나 하는 의문이 드는 거지. 나에겐 카페이너프에서의 기억이 그래. 집에서 걸어서 십오 분 거리에 있던 곳.


  처음엔 그냥 카페 손님으로 방문했었지. 공간이 커서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오래도록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이라서 좋다고 생각했어. 방문 횟수가 늘어가며 이곳의 궁극적인 목적을 알게 됐어.

  바로 나 같은 사람, 그 동네에 사는 청년 예술인에게 기회를 주는 장소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내가 그곳에 스며드는 건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어. 그곳은 나에게 편한 놀이터이기도 했고, 선망의 공간이기도 하다가, 그곳을 찾아오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아지트가 되었어.


  어느 날 이너프에 새로운 메뉴가 생겼어. 그건 못난이 사과로 만든 애플 크럼블. 고슬고슬한 소보루빵 가루가 올라간 애플파이. 못난이 사과를 잘게 잘라 설탕과 시나몬 가루, 그리고 약간의 레몬즙을 뿌려서 섞었다가 과자 반죽 사이에 넣어 커다란 오븐에 구워내면, 든든하고 맛있는 디저트가 탄생하지.

  처음 한 입이 아직도 기억나. 향긋한 사과와 깔끔한 시나몬이 어우러져서 입안 가득 풍미가 느껴졌어. 크럼블 식감도 부드럽고 맛있었지. 차갑게 식은 걸 먹을 때도 너무 맛있더라고. 애플 크럼블을 오븐에 넣고 구울 때면 공간 가득 과자 굽는 냄새가 너무 좋았어. 밀가루 반죽이 익어가는 고소하고 든든한 냄새 말이야.


  나는 종종 이너프에서 카페 보조로 일하곤 했거든. 커피를 내리고 다양한 음료를 제조하는 법도 그때 처음 배웠어. 카운터 안에서 손님을 맞이하다가도, 동네에 사는 배우와 모임을 만들어 연기를 공부하기도 하고, 작가 지망생과 같이 소설 쓰기 모임을 하기도 했어. 가끔 이너프에서 전시를 할 때도 있었는데, 그땐 전시장 지킴이가 되기도 했었지.

  나 혼자서는 해볼 수 없었던 다양한 일을 그곳에선 해볼 수 있었어. 이너프는 나에게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말해주는 장소였거든. 사실 그 애플 크럼블은 가능성의 맛이었나 봐. 기회의 맛이었을지도 모르지.


많은 아지트가 그랬듯이, 이너프도 경영상의 문제로 문을 닫았어. 예술인들과 동네 청소년, 청년들이 거쳐 갔던 장소는 그렇게 문을 닫았어.

  아직 그곳이 문을 닫은 게 실감이 안 나. 그 건물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마음만 먹으면 나도 다시 그 공간을 찾아갈 수는 있으니까 그런 거겠지. 그런데 어쨌든 그곳은 사라진 게 맞잖아. 믿기지 않는다고 해서 있었던 일이 취소되지는 않지.

  나는 애플 크럼블의 맛이 그리워.







연재 정보
연재명디저트
연재 슬로건달콤 쌉싸름한
연재 소개밥보다 디저트를 더 좋아합니다. 근데 가끔은 내가 정말 이 맛을 좋아하는지 아님 이 음식에 얽힌 분위기를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진짜 제 이야기인지 아님 만들어낸 이야기인지는 크게 상관없어요. 때론 맛보다 다른게 더 중요한 순간이 있듯이 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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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정보
필명무구
작가소개작가이자 예술가, 창작자로 오래오래 살아남고 싶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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