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미련이 있기에 미래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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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걸음마
[집순이의 방 탈출] 5회


미니멀이 되기엔 미련한   
by 백유주



  큰마음 먹고 옷 정리를 하기로 했다. 오래된 옷가지들을 내다 버리고 옷장이 가벼워지면 내 마음에도 여유가 생기고 새로운 기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옷 버리기 미션은 졸지에 패션쇼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 이거 아직 멀쩡하잖아.

  - 꽤 비싸게 주고 샀는데.

  - 언젠가 유행이 돌아올지도 몰라.

  - 살 조금만 더 빠지면 딱 보기 좋겠다.

  - 이렇게 입고 거기 갔을 때 참 즐거웠지.

 

  나는 사소한 물건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쉽게 버리지 못하는 편이다. 어릴 적부터 “너는 나중에 창고만 최소 100평인 집에 살아야 한다”라거나 “이거 죽을 때 죄다 이고 지고 갈 거냐”라는 식의 잔소리를 많이 들었다. 이제는 누구의 필체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고등학교 때 자습실을 오가며 친구들이 내 자리에 붙여놓은 장난스러운 응원과 쓸데없는 농담이 담긴 포스트잇 메모들이 잡동사니 상자에 여전히 한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지경이니 몇 년 된 옷들이야 귀여운 수준이다. 때때로 스스로 과하다 싶어질 정도지만. (진짜 버릴 거다! 언젠가는!)

 

  텅 빈 옷장을 보며 손을 탈탈 털고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게 될 줄 알았건만. ‘격자무늬 스키니진님은 더 이상 저희와 함께 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라는 냉정한 통보에 실패해 버린 나. 낡고 해진 옷 몇 벌 버린 것이 전부였고, 결국은 대부분을 다시 곱게 잘 개어 한층 더 견고하고 튼튼한 테트리스를 만들고 말았다.

  긴 시간 동안 나와 함께 방에 들어앉아 있던 물건들은 나의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나를 문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끄집어 내린 것이 아니라, 너무 멀리 도망치지 못하게 붙들고 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나 자신을 포기하고 싶었을 때 혼자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어떤 소원이든 들어주는 요술램프 속 지니가 지금 내 앞에 등장해 모든 문제와 고민과 아픔을 완벽하게 해결해 주고 유토피아 같은 미래를 200% 보장해 주겠다고 한다면 다시 힘을 내 살아볼 수 있을까?’

  나의 대답은 ‘아니’였다. 그런 마법 같은 일은 없다는 불신이 아니라, 그런 마법이 일어난다 해도 아무 미련도 없다는 허무였다.

 

  ‘나중에 다시 입어야지’

  ‘나중에 다시 읽어야지’

  이 다짐들이 얼마나 자주 실천될지는 미지수지만, 내 방을 채운 물건들이 또다시 한참이나 나의 관심과 손길에서 멀어질 게 뻔하지만, ‘나중에’라는 말에 담긴 나의 미련이 조금 반갑다. 미련이 있기에 미래가 있지 않을까.

  앞으로를 기약하는 단어들이 바람처럼 마음을 흔들고 그 속에서 크고 작은 바람이 생겨날 때면 불안과 두려움이 일기도 한다. 그러나 결코 미니멀이 될 수 없는 미련함으로 꿋꿋이 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보려 한다. 오래된 옷을 입고 새로운 외출을 할 수 있도록.





연재 정보
연재명집순이의 방 탈출
연재 슬로건다시 걸음마
연재 소개지독한 집순이가 도돌이표를 탈출하고자 꺼내든 작은 용기입니다.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바깥을 흘깃거리는 모습을 지켜봐 주세요.
하고 싶은 말말을 걸어볼게요. 같이 걸어볼까요?
작가 정보
필명백유주
작가소개지구본 모양 연필깎이로 연필을 깎아요. 몇 번의 세계 일주로 튼튼한 목발이 되죠. 목발을 짚고 두리번두리번 세상을 짚어보고 있어요.
작가의 말이불을 개면 날이 갤지도 몰라요.
추가 정보
인스타그램@iooy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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