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당신이 떠난 후에도 내가 사랑했던 당신과, 당신을 사랑했던 나를 기억하고 싶다는 욕심이 나를 쓰게 만들었어 자꾸만 나를 책상 앞에 앉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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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어떤 관계는 그저 우리의 섣부름만을 증명하곤 한다.
[섣부름, 미숙함] 5회


당신은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지 
by 소연




 

  내가 쓰는 글이 궁금해서 한국어 공부를 하겠다는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삐뚤거리는 한글로 가득한 편지들은 내내 다정하고, 내게 가장 소중한 언어를 배울 때 당신의 표정은 아이의 것처럼 투명했지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얼굴을 찌푸릴 때 생기는 미간의 옅은 주름도, 선생님- 하고 나를 부르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도, 백점짜리 시험지를 내밀며 당신의 노력을 자랑하는 순간도 나에게는 영원으로 남아버리지


  당신은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지 누군가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무거운 일이기에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고, 대신 당신을 서점에 데려가 당신에겐 미지의 영역인 시를 소리 내어 읊어주었지 당신은 발음이 마음에 드는 단어의 뜻을 재차 물었지 영어로는 옮길 수 없는 시어들을 설명해 주느라 애를 먹었어 우리의 놀이가 지루해지면 당신은 더듬더듬 동화책을 읽었고 당신의 손가락이 멈춘 문장을 보면 심청이는 인당수에 몸을 던졌다, 같은 것들이었어 인당수가 무엇인지 묻는 당신을 놀려주고 싶은 마음에 이상한 답을 하곤 했지 사전을 검색해 본 후에 가볍게 탓하는 표정으로 가득한 오후들이 삶을 버티게 하는 전부였지 미세한 갸웃거림과, 아주 느리게 넘어가는 책장과, 모르는 단어를 채집하던 손과, 내가 읽던 책에서 눈을 떼는 순간만을 기다려 궁금한 것을 묻던 당신의 몸짓이 나의 모든 것이었던 시절이었지


  우리의 관계가 영원할 것이라는 섣부른 확신은 하지 않기로 했었지 당신이 당신의 나라로 돌아가면 끝이 날 관계임을 알고 있었기에 순간을 사랑하는 일에 투신하기로 했었잖아 당신이 떠난 후에도 내가 사랑했던 당신과, 당신을 사랑했던 나를 기억하고 싶다는 욕심이 나를 쓰게 만들었어 자꾸만 나를 책상 앞에 앉혔어 당신이 내가 쓰는 글을 궁금해하다 보면 우리 관계의 수명이 조금은 길어지지 않을까, 또 내가 독일어를 유창하게 하게 되는 날까지 조금씩은 늘어나지 않을까, 생각하다 보면 차라리 언어를 모르는 아이가 되고 싶었지 우리의 끝을 유예할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기꺼이- 당신을 적어 내려갈 때는 마침표를 쓰고 싶지 않았어 무엇 하나 끝내고 싶지 않았던 마음을 당신은 이해하려나, 당신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알까, 피터 한트케의 시를 읊어주는 당신의 옆에서야 겨우 잠들던 내게 당신이 무엇이었는지 당신은 알고 있었을까


  사실 그런 것쯤은 몰라도 상관없었어 *천사였던 다미엘이 인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색채가 있는 세상을 마주하고 이게 파란색인가요, 물었던 것처럼 나도 누군가를 붙잡고 이게 사랑인가요, 묻고 싶었지 신은 공평해서 영원을 사는 천사에게는 흑백의 세상만을 허락했고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들에겐 다채로운 세상을 주었잖아 아이가 아이였을 때- 로 시작하는 베를린 천사의 시를 읊어줘, 당신이 살던 나라의 천사 이야기를 들려줘, 나는 기꺼이 영원 대신 총천연의 유한(有限)을 택할테니 당신도 허구의 영원을 탐하는 대신 반짝이는 현재에 눈이 멀었다고 말해줘



  後

  아아 지금껏 나를 잠식한 것은 모체를 알 수 없는 사생아 같은 우울뿐이었다 이제 사랑이 나를 잠식하려 하니 나는 어떻게 해야 하니 이건 나조차 나를 사랑하지 못할 때 서툰 한국어로 무구한 사랑을 속삭이려다 이내 익숙한 언어로 분명한 사랑을 속삭이는 당신의 곁에서 어느새 당신의 사랑을 받는 나를 사랑하게 되어 버렸던, 눈이 멀고 귀가 멀어 온통 당신의 자취만으로 가득했던 날들을 어떻게 떠내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투정이다 **누가 다정하면 죽을 것만 같았다는 시 구절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다정에 잠겨 죽을 것만 같은 날들이었다


*피터 한트케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김경미 시 <다정이 나를> 인용






연재 정보
연재명섣부름, 미숙함
연재 슬로건가끔 어떤 계절은 그저 우리의 섣부름만을 증명하곤 한다.
연재 소개사랑해 마지않았던, 그렇지만 끝내는 섣부름과 미숙함으로 기억되는 순간을 기록합니다.
미숙함에서 비롯된 슬픔마저도 모두 나의 시간이었기에.
하고 싶은 말당신은 어떤 미숙함의 시간을 지니고 있나요?
작가 정보
필명소연
작가소개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생각들이 활자로 기록되는 순간을 사랑합니다. 
생계를 위해 사랑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작가의 말기억을 사랑하고 기록을 신뢰합니다. 
추가 정보
인스타그램@blankk00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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