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희미한 실루엣과 색채의 퍼즐 위에, 분위기만 선명히 덧칠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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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공간의 무한한 확장과 변이, 그리고 자유로움.
[내가 사랑하는 전시 공간의 공기를 소개합니다] 4회

<프랑스국립현대미술관 전 ‒ 라울 뒤피> 전시를 보고 파생된 감상의 조각, 더현대서울  
by 진경




  여름이면 패들보드 타는 것을 좋아해. 정확한 용어로는 스탠딩업 패들보드. 말하자면 보드 위에 발을 딛고 일어선 채, 노를 저으며 물의 표면을 보고 느끼는 일이야. 바다 위에서 타는 패들보드는 강에서 타는 패들보드와 꽤 다르거든. 강에서는 강가에 부딪히며 반사된 파동이 합해져서 복잡하고 불규칙한 표면이 되는 반면, 바다는 면적이 훨씬 커서 불어오는 바람을 표면으로 바로 반영하는 느낌이야. 바다 위에서 바람 잔잔한 날의 파도는 리듬감 있는 음악이 되고, 바람 부는 날의 파도는 수많은 곡면들을 불러 모아 나의 중심을 흩뜨리며 모험심을 자극해. 매일의 날씨가 다르고, 순간의 바람이 다르고, 같은 파도는 없어. 그리고 나는 두 발로 보드를 통해 한가운데서 단 하루의 바다를 느끼는 거지.

  가끔 바다가 큰 곡률을 그리는 날에는 서서 타기 힘들어질 때가 있어. 나의 방법은, 다가오는 파도의 곡면에 최대한 날카로워지는 거야. 노를 저어 곡면과 수직으로 보드를 돌리면 맞서는 표면적이 작아지잖아. 그렇게 몰려오는 파동을 가르면 좀 더 쉽게 파도를 버틸 수 있더라. 반대로 곡면과 평행하게 보드를 놔두면 뭉툭하고 넓은 면으로 큰 파도의 파동을 그대로 마주하게 되고, 그럼 금방 중심을 잃어버려.

  뭉툭한 면을 댄다는 건 그만큼의 면적을 감당해야 한다는 의미야. 그만큼 위험도, 타격도 크겠지. 상처가 날 때도, 날카롭게 베인 상처보다 끝이 무딘 물체에 타격을 입은 경우에 더 치료가 힘들 때도 있어. 그 면적을 모두 받아내느라 어디를 정확히 다쳤는지 육안으로 확인이 되지 않기 때문이야. 기억하는 일도 마찬가지야. 난 기억력이 좋은 편이 아니라, 어떤 추억은 그 때의 분위기로만 남아있어. 희미한 실루엣과 색채의 퍼즐 위에, 분위기만 선명히 덧칠된 채로. 네가 그리울수록 추상적으로. 어느 밤에는 그런 추억에 아파하면서, 내내 남아있을 거라면 차라리 날카롭게 베어줬으면 좋겠다고 절실하게 생각하기도 해. 하지만 해상도를 잃어버린 추억은, 이미 끝이 뭉툭해져 있기 마련이거든.

  그래서 뭉툭하다는 것은 또한 그만큼의 면적을 온전히 겪는 일이지. 어떤 일에 대해서는 몇 편의 뉴스들보다 시 한 편이 주는 인상이 더 크기도 하잖아. 마치 수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심장에 와 닿는 경험을 한 것처럼. 뭉툭한 기억들에는 그만큼 당시의 인상이 강렬하게 새겨져 있기도 해. 그리워도 돌아갈 수 없고 다시 마주할 수도 없지만, 그럼에도 찬란했고 빛나던 우리의 순간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전히 아파야 비로소 잠잠해지는 기억들이지.

  기억의 바다가 생각보다 사나워, 큰 파도에 중심을 잃을까봐 무서워지는 날. 그래서 그럴 때 빠지지 않으려면 날카롭게 보드를 타야 하지 않냐고? 글쎄. 그렇게 기를 쓰고 맞서면 금방 지칠지도 몰라. 피할 수 없다면 때로는 뭉툭한 면을 맞대고, 두 발로 그 날의 바다가 전달하는 파동을 느끼는 시간도 필요하지 않을까. 다가오는 파도의 곡면을 갈라서 애써 서있으려 하기보다, 바다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스란히 파도를 겪어내는 것. 그리고 헤엄쳐 보드 위에 다시 일어설 용기를 가지는 것. 언젠가는 반드시 바람이 걷히고 잔잔해진 바다의 음악소리를 다시 듣게 될 날이 올 테니까.



 





연재 정보
연재명내가 사랑하는 전시 공간의 공기를 소개합니다
연재 슬로건생각하는 공간의 무한한 확장과 변이, 그리고 자유로움.
연재 소개작품에서 파생되는 생각은 어디든지 도달할 수 있고 무엇이든 틀리지 않았다. 내가 전시에 빠져드는 경로를 기록하고 공유하기. 
하고 싶은 말
작가 정보
필명진경
작가소개검은색과 흰색 사이 줄다리기를 좋아합니다. 경계에 살며 경계 없는 세상을 그립니다. 가끔 획으로 생긴 틈으로 굴러 떨어지기도 합니다. 
작가의 말0과 1 사이 수많은 숫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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