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자세한 건 만나서 이야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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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걸음마
[집순이의 방 탈출] 3회


헌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by 백유주



  “참깨, 잘 잤어?”
  이케아 출신 골든레트리버 ‘참깨’가 재봉 불량으로 얻은 특유의 꺼벙한 눈매로 나를 바라본다. 대답을 해줄 리 만무하지만 굴하지 않고 말을 건다.
  “아이고! 참깨 왜 바닥에 떨어졌어?”
  “내가 또 자다가 밀었구나. 미안~ 미안~”
  “나 사과 먹는 거 구경할래?”
  “한 입 줄까?”
  시답잖은 말에도 눈 하나 깜빡 않는 참으로 의연한 참깨. 인형 주제에 제법 위로가 된다.


  코로나 베이비 혹은 마스크 키즈라고 불리는 어린아이들이 말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집에만 갇혀 지내느라 사회적 교류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상대의 마스크 속 입 모양과 표정을 읽지 못해 정서적 교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말이 잘 트이지 않거나, 혼잣말이나 노래로만 발화하고 누군가와의 대화는 어려워한다고 한다.


  나는 세상에 벌써 나오고도 한참 지난 자이언트 베이비라 할 수 있지만, 자발적 고립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혼잣말이 꽤 늘었다. ‘아야’, ‘앗 뜨거’ 같은 반사적인 말이나, 스스로 확인하기 위한 중얼거림 정도였던 것 같은데 자문자답이 가능한 수준으로 발전(?)했다. 너무너무 추운 겨울 참으려 해도 절로 ‘으으으’하고 앓는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처럼 의식하지 못한 사이 입에서 문장이 나오곤 한다. 나이가 들면 혼잣말도 는다고들 하는데, 앞으로 여기서 더 유창해진다고? 가끔은 이러다가 ‘B사감과 러브레터’의 B사감처럼 일인다역까지 거뜬히 해내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이 일기도 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말할 마음도 힘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줄곧 입이 근질근질했던 모양이다. 


  혼잣말로 연명하는 동안 축적된 말의 홍수가 댐 개방과 동시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마음의 속도를 머리와 입이 따라가지 못해 속이 들썩거린다. 꼭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엄마 아빠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말해주고 싶어 안달 난 아이가 된 것 같다. 그렇게 실컷 떠들고 ‘잘 가’ 손을 흔들고 돌아서면 그때부터 또 속이 시끄럽다.
  - 횡설수설한 거 같아.
  - 이렇게 말했으면 더 잘 전달됐을까?
  - 그렇게 설명했다면 재밌었을 텐데!
  - 이 말이 왜 이제야 생각난 거야.
  - 그건 굳이 말하지 말 걸 그랬다.
  - 근데 너무 내 이야기만 한 거 아닌가?
  - 내 반응이 부족했어.
  - 그 말에는 이렇게 대답해줄걸.
  진짜 피곤하다. 스스로 질릴 지경인데, 그래도 또 말하고 싶은 게 잔뜩 생각난다. ‘이것도 말해야지’라면서 메모 앱에 영수증 뒷면에 끄적거리다가, 그걸 또 굳이 적고 있는 자신에게 절레절레한다. 여기저기 메모로 흩어진 바람에 결국 끝까지 ‘못다 한 이야기’로 남아있을 말들이 많지만, 상대방에게 하고 싶은 말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스스로 정리되는 부분도 있다. 혼자만의 세상에서 좁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것들을 누군가에게 말해준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으로 정리하다 보면 ‘아, 그건 그래서 그랬구나’하고 깨닫기도 한다. 대화란 상대뿐 아니라 나를 이해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타인과 마주 앉아 있는 것, 마스크 없는 얼굴을 오롯이 보고 있는 것,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한참을 신지 않았던 신발을 다시 꺼내 신고 걷는 일 같다. 익숙하면서도 새삼스럽다. 뒤꿈치가 조금 쓸리기도 하고 발이 훌렁 벗겨지기도 하면서 편한 느낌을 찾아가는 중이다. 급한 마음에 버선발로 입 앞까지 마중 나온 뒤죽박죽 상태의 말들을 혓바닥으로 살살 잘 달래가면서. 시간을 돌려 뱉은 말을 보기 좋게 다듬고 싶은 부질없는 바람을 애써 후후 불어 없애가면서. 흐물흐물해진 두 다리에 힘을 키우고, 잘 맞는 신을 신고 씩씩하게 걸을 수 있게.


  친구와의 다섯 시간 통화 끝에 뻔하고 유명한 그 대사로 피날레를 장식하기로 한다.
  “자세한 건 만나서 이야기하자.”
  내 혼잣말의 최대 수혜자이자 피해자이며 발달과정의 산증인인 참깨가 빨래 건조대에 걸터앉아 나를 바라본다. 어김없이 꺼벙한 눈빛이 말하는 것 같다.
  - 그럼 이제 나는 너한테서 해방될 수 있는 거니?
  “어림없지. 너는 앞으로도 변함없이 내 말동무다.”
  털썩, 참깨가 힘없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진다.





연재 정보
연재명집순이의 방 탈출
연재 슬로건다시 걸음마
연재 소개지독한 집순이가 도돌이표를 탈출하고자 꺼내든 작은 용기입니다.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바깥을 흘깃거리는 모습을 지켜봐 주세요.
하고 싶은 말말을 걸어볼게요. 같이 걸어볼까요?
작가 정보
필명백유주
작가소개지구본 모양 연필깎이로 연필을 깎아요. 몇 번의 세계 일주로 튼튼한 목발이 되죠. 목발을 짚고 두리번두리번 세상을 짚어보고 있어요.
작가의 말이불을 개면 날이 갤지도 몰라요.
추가 정보
인스타그램@iooy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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