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술의 정도와 말의 수위는 비례하는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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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인 모두에게 남기는 편지
[여섯 다리 법칙] 2회


2화 🦋 🦋 [두 마리, 수환]
by #F0F8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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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세빈과 친하냐고 물으면, 단박에 그렇다고 대답할 순 없지만 절대 아니라고도 대답할 수 없다. 나와 세빈의 관계는 딱 그 정도였다. 4년 전, 대학에 막 입학했을 땐 잠깐 친했지만 이제는 연락도 잘 안 하는 과 동기. 근 1년 정도 세빈의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최근 그에 대한 믿을 수 없는 근황을 알게 됐다.

  처음 겪어보는 동갑인, 심지어 동기인 누군가의 죽음은 쉽게 와닿을 만한 현실은 아니었다. 과 단톡방에 세빈의 장례식에 대한 공지가 올라오고 나서야 서서히 실감이 났다. 급히 아빠의 까만 정장을 빌려 입었다. 어떤 표정으로, 어떤 기분으로 가야 하는지 도저히 감이 오지 않았다.


  “수환아, 소금 뿌려라.”


  장례식에 다녀오자마자 아빠가 내게 건넨 말이었다. 소금을 받아 등 뒤로 던지자 묘한 죄책감에 입안이 쓴 기분이 들었다. 세빈을 부정하는 것만 같았다. 손에 남은 소금을 털어내고 옷을 갈아입었다. 코끝에 향냄새가 남아있었다. 장례식장은 이미 벗어났지만 기분은 아직 그곳에 남아있었다.


  “입에 에프킬라를 물고 있었대.”

  “자살이었다는 거야?”

  “어, 그렇다던데.”


  차마 장례식장에서 나누지 못하고 집에 오는 길에 주고받았던 대화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분명 3년 전 세빈은 누구보다 활발한 친구였다. 과에 세빈이 없는 술자리는 있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사람이 일주일 내내 술을 마실 수 있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짓말 조금 보태서, 과에 세빈이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세빈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활동적이던 애가 1년 전부터 서서히 보이지 않더니 반년 전부터는 휴학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학교 근처에 사는지 동기들이 지나다니며 간혹 마주치기도 했다는 얘기도 들려왔지만, 세빈이 시선을 피하는 바람에 확실히 세빈인지 알 수 없었단다.

  장례식에 다녀오고 2주 남짓 지나서야 동기들 사이에서 한번 모이자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총 열 명 정도가 모임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인원이 꽤나 많아 오랜만에 술집에 예약전화도 걸었다. 이유에 맞지 않게, 조금 들뜨는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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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너무 오랜만에 많이 마셨다. 술의 정도와 말의 수위는 비례하는 게 분명하다. 모두들 제정신이라면 꺼낼 수 없었을 주제를 입에 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감자는 단연 세빈이었다.


  “너 그거 못 들었어? 걔, 사고 쳐서 휴학한 거래.”

  “사고? 무슨 사고?”

  “몰라? 나도 어디서 들은 거라. 근데 확실하대. 내 친구 동기가 직접 겪은 일이랬어.”

  “그럼 그거 때문에 자살한 거야?”

  “내가 듣기로는 빚이 많았다던데.”

  “빚? 학생이 무슨 빚이 많아.”

  “헐 그럼 그 사고 때문에 빚이 생긴 거 아냐?”


  “근데 걔, 자살은 맞아?”


  술자리를 채우던 추측들의 틈새로 누군가의 질문이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고요가 테이블을 감쌌다. 역시 다들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의문을 품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게, 항상 밝던 세빈의 죽음은 너무 갑작스러웠으니까. 하지만 자살이 아니라기에, 세빈의 죽음은 헤프닝 정도로 취급받았다. 만약 세빈이.. 그러니까, 살해당했다면, 이것보다 더 떠들썩하지 않았을까. 아마 모두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에이, 무슨 그런 얘기를 해. 세빈이, 되게 좋은 애였잖아. 원한 같은 거 살 일도 없는.”


  다들 기억하지? 과대의 말에 모두가 긍정의 웅얼거림을 자아냈다. 세빈을 위하여, 흔해 빠진 건배사에 잔을 부딪혔다. 분명 세빈은 좋은 애였다. 언젠가 세빈과 단둘이 남게 된 술자리에서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연애상담을 했던 적이 있다. 당시 나는 동기인 서희와 사귀고 있었다. 서희는 씨씨가 부담스럽다며 비밀로 하길 원했고, 연애 초의 혈기 왕성한 나는 사귀는 티를 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한 대 때리고 싶다. 아마 서희도 그랬을 것이다. 불평불만을 늘어놓던 내게 세빈은 ‘언젠가 모두가 알게 될 텐데 지금 조금만 맞춰주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다.


  “씨씨가 한둘도 아니고 나중에 어차피 다 밝혀질 텐데, 지금은 여자친구 말 들어주는 게 낫지.”


  세빈의 말은 옳았다. 굳이 일부러 말하지 않았는데도 알음알음 모두가 알게 되었다. 심지어는 나와 친한 다른 동기 중에도 씨씨가 있었다. 미리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배신감이 들었지만 이내 나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떠올렸다. 나도 세빈을 제외하고는 같은 과 동기 중에서는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가만 생각해보니 세빈은 우리 모두의 대나무 숲 같았다. 어떤 자리에도 어색하지 않게 끼어들어 이야기를 나누고, 어느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까지 털어놓게 만드는 움직이는 대나무숲.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세빈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세빈이 걔, 진짜 고민 잘 들어줬는데.”


  순간 생각을 입 밖으로 내보낸 줄 알았다. 말을 꺼낸 정우는 세빈과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 일 학년 때, 누가 컨닝하는 걸 봐서 너무 마음이 복잡했거든. 동기고 그러니까 누군지 말하긴 좀 그래서 혼자 속 썩이다가 세빈이한테만 말했는데, 엄청 잘 들어주고 공감 잘해줘서 고마웠어. 입도 무거워서 딱히 소문도 안 퍼지고.”

  “어? 나 그거 들어본 것 같은데?”


  과대의 대답에 정우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과대는 말을 이어 나갔다.


  “그거, 컨닝했다는 얘기. 어디 술자리에서 분명 들었어. 근데 종강 후고 시험도 다 끝나서 쉬쉬하는 분위기라 그냥 넘어갔을걸. 별로 중요한 시험도 아니라 다들 귀찮아서.”

  “나는 정말 세빈이한테만 말했는데..?”

  “어디 다른 데 가서 말한 거 아냐? 정우 너 잘 생각해봐.”

  “진짜 아냐! 똑똑히 기억해. 그때 세빈이가 일 크게 벌이는 게 싫은 거면 완전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 그래서 나도 가만있었단 말이야.”

  “그럼 세빈이가 말한 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주위를 둘러싼 다른 테이블의 소음이 낯설게 느껴졌다. 다들 자신이 털어놓았던 고민도 새어나갔던 건 아닌지 불안해하는 표정이 보였다. 나는 옆에 앉은 과대에게만 들리게 말을 건넸다.


  “너도 뭐 있냐?”

  “아니, 씨…. 다 지났으니까 하는 얘긴데, 나 공금 잃어버린 적 있다. 금방 사비로 채워놓긴 했는데…. 혹시 너 알고 있었냐?”

  “그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적어도 여기 있는 애들은 다 알걸. 어디서 들었는데.”

  “뭐…? 그럼 진짜 세빈이가…?”


  과대는 상당히 충격 받은 것 같아 보였다. 주위를 돌아보니 얘만 이런 것도 아니었다. 다들 어지간히 숨기던 것도 많았던 모양이다. 웅성거림이 몸집을 부풀렸다. 착한 척하더니 다 가식이었냐는 뉘앙스의 말이 군데군데 섞여 나왔다.


  “세빈이는 절대 그럴만한 애가 아니야.”


  소란스러움을 파고든 건 얼굴만 간신히 기억나는 동기의 말이었다. 이름이 뭐더라.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과대에게 물어보고서야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얘가 세빈과 친했던가?


  “절대, 절대 그럴 애가 아니라고, 세빈이는… 절대…”

  “그럼 우리가 다 거짓말하고 있다는 거야?”


  과대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그 애는 고개를 숙인 채 흐느꼈다. 더 얼어붙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분위기가 더 얼어붙었다. 우린 오늘 이러려고 모인 게 아닌데.

  따르르릉. 타이밍 좋게 전화가 울렸다. 나는 전화를 받겠다는 핑계로 술자리를 벗어났다. 등 뒤로 과대의 한숨 소리, 다른 동기들의 수군거리는 소리, 그리고 흐느끼는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가관이었다.

  밖으로 나올 때까지도 전화는 끊기지 않았다. 아마 늦게라도 술자리에 합류하려는 누군가라고 생각했다. 오고 싶다고 하면 분위기 싸하니까 오지 말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전화를 건 사람은 전혀 의외의 인물이었다.


  “어, 수환아! 시간 괜찮아? 물어볼 게 있는데, 너네 과에…”


  발신자는 작년에 팀플에서 만나 친해진 친구, 광연이었다. 프리라이더인 팀원을 욕하다가 함께 술까지 마시며 친해졌다. 하지만 팀플에서 만난 인연은 오래 가기 어렵기 마련이라, 그 뒤로 따로 만나거나 연락하진 않았다.

  광연의 이야기는 갑작스레 전화할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고 느껴질 만큼 놀라웠다. 세빈의 죽음을 신고한 사람이 광연이라니. 새삼 세상이 좁구나 싶었다. 나는 광연에게 세빈을 추모하기 위한 자리에 와있다고 전했다.


  “역시 너네 과 맞았구나. 아마 자살이 맞는 것 같아. 경찰도 따로 더 조사 안 하는 것 같더라고. 근데 그 세빈이라는 사람, 좀 이상했던 것 같아.”


  광연은 세빈이 집에서 혼자 펄떡이며 춤을 춘 적이 있다고 말했다. 마치 굿을 하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고. 걔가 뭔 굿이야, 라고 대답하면서도 괜히 뒷골이 오싹해졌다. 소금을 뿌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괜히 손을 한번 털어내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에 얼굴 한번 보자는 이뤄지지 않을 약속만 남긴 채.

  자리로 돌아가 보니 인원이 줄어있었다. 전화하는 사이에 가라앉은 공기를 견디지 못하고 떠난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광연과의 전화를 곱씹으며 의자에 앉는데, 과대가 말을 걸어왔다.


  “누구냐? 서희? 너네도 참 오래 사귄다.”

  “아, 너 모르냐? 나 헤어졌잖아.”

  “뭐?”


  과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꽤나 큰 목소리에 다른 애들이 이쪽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아, 이 얘기는 하고 싶지 않은데. 당장 화제를 돌릴만한 이야기가 필요했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작년에 팀플에서 만난 애가 있는데..”


[다음에 계속]






연재 정보
연재명여섯 다리 법칙
연재 슬로건엑스트라인 모두에게 남기는 편지
연재 소개우리는 얼마나 가깝고도 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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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건물 남자가 에프킬라를 입에 물고 죽었단다. 이유가 뭔지 궁금하지만, 알 방법이 없었다.
친구가 옆 건물 남자와 같은 과 동기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여섯 다리만 건너면 모두 아는 사이라고? 대학가에선 4명이면 충분하다.

각기 다른 네 개의 시선을 통해, 가깝고도 먼 그의 죽음에 다가간다.
하고 싶은 말누군가의 인생에서 엑스트라였던 A의 삶, 배경이었던 B의 삶, 소품이었던 C의 삶을 위하여 !
작가 정보
필명#F0F8FF
작가소개쓰고 그리고 찍으며 삽니다. 
작가의 말뛰어들었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추가 정보
인스타그램@alice_lives_in_b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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