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감자 맛 아보카도가 나를 상심시켜도 괜찮다. 다음엔 이 미련한 짓을 하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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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익은 인생들을 위하여
[내가 사랑한 모든 것들이 나를 아프게 해요] 2회


덜 익은 아보카도(2)  
by 연수


  



  세상엔 알고 싶지 않았지만 억지로 알게 되는 일들이 있다. 가령, 덜 익은 아보카도를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밍밍한 감자 맛이 난다는 것. 맛없는 감자 맛 아보카도가 나를 상심시켜도 괜찮다. 다음엔 이 미련한 짓을 하지 않을 테니까. 

  갑자기 웬 아보카도 타령이냐고? 아니다. 이건 흔해빠진 사랑 타령.

  나는 지금 막 아보카도를 전자레인지에서 꺼내는 참이다. 억지로 익혀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걸 이제라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실 덜 익은 건 아보카도가 아니라 나의 슬픔이었다. 사랑이었냐고 물으면, 사랑이었지. 그래서 내가 사랑한 모든 것들은 지옥의 불꽃이 되어 내게 지옥 속을 살으라 말하고 있다.


  작은 개인 카페였다. 주말이라 사람들이 웅성거렸고, 추운 날에도 쉐이크를 주문하는 사람이 있는지 이따금 믹서기 소리가 웅웅댔다. 그리고 바깥의 소란함과 동떨어진 적막 속의 너와 내가 있었다.

  너는 진동벨을 기다리고 있다. "잠시만, 커피 좀 가져올게."라는 말을 헤어지는 와중에 불쑥 하는 것은 너무 모양빠지는 일이다. 커피가 나오기 전까지는 우리의 헤어짐을 시작할 수 없어, 우습게도.

  고작 진동벨 하나에 묶여 주저앉혀진 우리의 공기는 그래도 견딜만 하다. 정말 고역인 건 너의 눈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너의 눈에 있는 담담함과, 파편의 원망이 내 감정을 헤집었다. 강제로 고요한 그 시간 속에서 설명 없는 네 눈빛에 귀가 터질 것 같았다.

  우웅. 하고 벨이 울렸다. 우리는 드디어 헤어질 준비가 됐다.

  "편하게 얘기해."

  네가 말했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나눌 이야기는 편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걸 알면서 그렇게 말하는 너는 못됐다. 그리고 나는 못된 너를 사랑하지.


  사랑하는 데 어떻게 헤어질 수 있어? 열일곱의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럴만한 나이다. 

  그러나 이제는 알지, 사랑해도 얼마든지 헤어질 수 있다는 걸. 결국엔 나 하나만 견디기도 벅차니까. 자기 자신보다 사랑하는 무언가를 만드는 건 점점 어려워진다. 내가 나를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그럴만한 기력이 없어서 그렇다. 

  무언갈 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일이어서 많은 걸 조금 덜 사랑하는 채로 살게 된다. 

  조금 외롭지만 편한 방식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해주는 연인을 만나는 건 굉장히 어렵다. 그 아득히 먼 가능성을 보자면 '불가능'이라 부르는 게 맞다. 그러니 나는 자기 자신보다 서로를 더 사랑하며 사는 연인들이 '불가능'을 해낸 '비정상적' 특별함이라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역시, 자기 자신을 제일 사랑하며 살아가는 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 아니겠는가?

  우리는 자연스러운 연인이었다. 

  자기 자신보다는 덜,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는 더, 서로를 사랑했다. 

  이것도 아주 어렵고 감사한 일이다. 내 경험 상으로는 그렇다. 그러니 사랑하고 또 행복했지. 그래, 나는 너와 함께한 날들이 행복했다. 그러나 행복이 길지는 않았다.


  “그래, 너는 결국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된 거야.”

  너의 자조적인 말에 나는 내 머릿속으로 깊이 침잠하기 시작했다.

  정말? 정말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게 된 걸까?

  정말 그게 전부일까?

  아니다, 너를 향해 뛰는 맥박과 넘치는 눈물샘이, 나의 모든 생체 기관이 말하고 있다. 나는 너를 아직 사랑하고 있다고. 그러면 왜 나는 너와 헤어지나.

  너는 가시 같은 사람. 어린왕자도 떠나간 장미꽃 같은 사람. 예쁘게 만개한 얼굴로 나를 홀리고 나를 설레게 하고. 그렇게 너를 사랑한 나를 찌르고 또 찔러댄 장미 가시.

  그런 너를 사랑했던 나는, 그럼에도, 너무나도 평범하고 자연스레, 나를 더 사랑하니까.

  그러니까 헤어지자.


  내 입에서 나온 칼날은 내 심장에 가 꽂혔다. 고여 있던 핏물이 흐르니 차라리 속이 시원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심장에 있는 피를 다 빼낼 기세로 나는 울었다. 

  너를 사랑해, 헤어지자, 너를 사랑해, 헤어지자. 이 우스꽝스러운 단어의 배열이 기막혀서 자꾸 울었다. 너를 사랑해, 헤어지고 싶지 않아. 그런데 너는 왜, 나를 아프게 해.

  원망과 체념, 사랑과 희망이 덕지덕지 섞인 눈물을 네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쏟아냈다.

  나는 부끄러웠다. 

  이따금 네 곁에서 행복하지 않은 순간들에.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는 게 맞을까, 피로한 그 질문이 문득 떠오르는 순간들에. 

  내 생각처럼은 아닐지도 몰라, 마음 속에서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그 때에. 

  너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내가 부끄러웠다. 그걸 사람들이 알게 될까 두려웠다.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쫓겨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는 내가, 나보다 너를 더 사랑하여 끝내 버텨보려는 용기조차 없는 내가 너무 싫어서. 그래서 헤어지고 싶었다. 미안해, 나는 겁쟁이야.


  그렇게 나는 딱딱한 껍질을 얇게 두르고 몸을 옹송그렸다. 아보카도처럼.





연재 정보
연재명내가 사랑한 모든 것들이 나를 아프게 해요
연재 슬로건덜 익은 인생들을 위하여
연재 소개내가 사랑한 모든 것들이 나를 아프게 해도, 나는 끊임없이 사랑해야 할까요? 사랑한 모든 순간, 아파한 모든 순간의 향기가 이 글에서 느껴지면 좋겠습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어리석고 지혜로운 인간들의 동호회를 위하여.
하고 싶은 말
작가 정보
필명연수
작가소개아홉수, 덜 익은 인생을 사랑하는 법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사랑한 순간과 아파한 순간들을 기록해 볼게요. 
작가의 말내가 사랑한 모든 것들이 나를 아프게 해도, 나는 끊임없이 사랑해야 할까요? 
추가 정보
인스타그램@8u_palet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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