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언제 발을 떼야하는지 여자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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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line)에서 떨어져요.
[안과 밖 혹은 그 아래] 1회


안 그리고 밖
by 오순




1. 안

남자는 화면 속에 눈을 박는다. 화면 속의 여자는 표정이 없다. 울고 있다. 남자는 알아채지 못한다. 하물며 여자가 어떤 색깔의 옷을 입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남자가 고작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여자가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는다는 사실뿐이다. 보행 신호에도 섰던 그 자리에서 전신주마냥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다. 도로의 횡단보도를 밟지 않는다. 10여 분 동안 신호등이 다섯 번 바뀌었다. 여자의 눈동자는 횡단보도를 걷는 사람들의 얼굴이나 뒤통수를 보고 있다. 빨간불에서 초록불로 바뀌고 이내 신호등의 초록불이 깜빡인다. 남자는 헤아린다. 사라졌다 보였다 점멸이 스물두 번 반복된다.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 여자가 옷가게 윈도우 안에 세워진 마네킹을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방범용 CCTV에 찍힌 여자는 교차로 앞에 서서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는다.

 

2. 밖

여자는 매일 낮 12시에 D대학 정문을 향해 나있는 네거리 교차로 앞에 선다. 횡단보도를 바쁘게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곳에 서서 까만 아스팔트 바닥에 하얀 건반처럼 깔린 표시선을 응시한다.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고 사람들은 일제히 그 하얀 선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초록불이 깜빡인다.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걷거나 걸음을 재촉하듯 뛴다. 긴 머리 대학생과 짧은 머리 사내가 곁눈으로 옆을 지나가는 행인을 힐끗거린다. 들고 있던 토끼 인형을 떨어뜨린 아이의 손을 잡은 엄마는 소리친다. 빨리! 보라색 머리와 노란색 머리를 한 연인이 팔짱을 낀 채 횡단하며 영화에서처럼 서로의 입술을 맞춘다. 누군가 아는 목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는 한 사람의 엉거주춤한 동작을 여자는 쳐다본다. 여자는 신호등 아래 점등되어 줄어드는 숫자를 뚫어져라 본다. 언제 발을 떼야 하는지 여자는 모른다.

 

3. 그리고(and)

남자는 매일같이 교차로 앞에 서 있는 화면 속의 여자에게 손을 흔든다. 마치 여자가 기다리는 것이 남자 자신인 것 마냥. 여자는 화면 속의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남자가 여자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남자는 여자를 바라보며 손을 흔드는 그 잠깐 동안을 위해 하루를 버틴다. 어느 순간 여자는 자신을 향해 손짓하는 남자를 느낀다. 여자는 마침내 발을 떼기 시작하고 횡단보도의 흰 선을 향해 나아간다. 네거리 교차로 중심을 향해 여자가 나아가자 사방에서 산발적으로 자동차 클랙슨이 울린다. 신호등은 빨간불이다. 여자는 우주의 근원인 태양 빛을 바라보듯 전방의 신호등을 향해 나아간다. 자동차 급발진 소리가 굉음처럼 여자의 달팽이관을 파고든다. 여자는 쓰러진다. 비명소리는 시커먼 아스팔트 바닥에 묻힌다. 누운 여자의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 아래로 검은 피가 새어 나온다. 남자는 하얀 표시선을 덮는 여자의 피가 붉다는 사실을 안다. 여자의 뜬 눈에는 막 바뀐 신호등의 초록빛이 담긴다





연재 정보
연재명안과 밖 혹은 그 아래
연재 슬로건그 선(line)에서 떨어져요.
연재 소개들여다보려고요.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불안이며 슬픔이며 드러내지 못한 욕망까지. 영영 그 안을 헤매는 길밖에 도리가 없다 해도 말이죠.
하고 싶은 말어떤 색깔을 좋아하세요? 저는 블루를 좋아합니다. 
작가 정보
필명오순
작가소개손목에 선인장과 달을 새겨 넣었어요. 
작가의 말파프리카를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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