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눈으로 직접 보아야만 존재하는 세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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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공간의 무한한 확장과 변이, 그리고 자유로움.
[내가 사랑하는 전시 공간의 공기를 소개합니다] 1회

연재를 시작하며
by 진경




  이 글에 대한 소개는 시에서부터 출발하려고 한다. 시는 고등학교 때부터 어느 정도 좋아했던 것 같다.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도종환 시인의 시집을 아껴가며 읽기도 했고,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알려주시는 시들 중 마음에 드는 시를 몇 개 필사해두었던 기억도 난다. 하지만 수능이라는 큰 허들이 있었으므로 그땐 지금처럼 자발적으로 좋아하기가 쉽지 않았다. 시를 감상하는 데는 따라가야만 하는 경로가 있었고, 문학에서 나오는 문제에는 정답이 있고 오답이 있었다. 항상 시를 읽을 때 시인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명확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시를 바라보는 마음을 늘 무겁게 만들었다.

  대학에 들어오고, 시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 건 이해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사라지고 나서부터였다. 시를 아무렇게나 감상해도 괜찮다. 나의 경험과 기억을 투영하여도 되고, 시인에 대해 생각해봐도 되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아무도 시를 얼마나 잘 이해했는지 나를 평가하지 않는다. 내가 받아들이는 만큼만, 한 번에 빠져들 수도 있고 매번 조금씩만 다가가도 된다. 정형화된 방식을 벗어나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기까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그리고 지금은 서점에 가면 시집 코너부터 찾는 일이 습관이 되었다.

내가 미술과 친해지게 된 과정은 시와 비슷하다. 전에는 미술 작품들에 담긴 메시지들이 정해져 있고, 어떤 레벨의 전문적인 지식이 있어야만 제대로 된 감상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내 감상이 다수의 감상과 다르면 주눅이 들 때도 있었다. 이런 생각들은 몇 년 전 유럽 여행을 간 계기로 다 깨져버렸다. 추운 겨울 속에 미술관은 해외에 처음 온 여행객이 혼자 시간을 보내기 딱 알맞은 곳이었다. 교양 수업에서 사진으로 본 작품들이 눈앞에 있는데, 분명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들과는 달랐다. 몰랐던 색감을 발견하고, 조각의 살결이 보이고, 숨겨진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었다. 그곳엔 눈으로 직접 보아야만 존재하는 세계가 있었다. 뭘 알고 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작품 앞에서 심장에 와닿는 것들이 중요했다. 그리고 작품에 도달하는 나만의 경로를 그리기 위해 내가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감상하고 생각하고 상상할 수 있었다. 작가의 의도나 작품의 의의 같은 것들은 그다음의 일이었다.

  그 후로 높아 보였던 미술관의 문턱이 사라졌다. 지금은 미술관이 너무 친숙하다. 어떤 특정한 미술관을 좋아한다기보다, 모든 미술관이 좋다. 미술관의 공기는 늘 포텐셜(potential)을 머금고 있다. 포텐셜은 물리학적 용어로 쓰면 어떤 잠재적인 에너지를 의미한다. 어떤 물체가 당장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언젠가는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럴 수 있다는 걸 내가 ‘알고 있다’. 미술관은 내가 언제든 생각의 화폭을 펼칠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람이 많으면 오롯이 감상할 시간이 부족해지기도 하고 매번 강렬한 작품들을 만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순간의 시공간을 항상 표면 아래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미술관에는 그 미술관의 소장품들도 있지만 시기에 따라 다양한 전시들이 열리기도 한다. 사실 전시를 빼놓고 미술관을 이야기하기는 힘들다. 내가 특히 전시를 좋아하는 이유는 전시마다 고유의 맥락이 있다는 점이다. 전시는 큐레이터가 구성하는 맥락에 따라 여러 가지 작품들이 주제에 따라 분류되고 배치된다. 한 작가에 대한 개인전을 하더라도 전시마다 구성이 다르고 그만큼의 다른 이야기가 있다. 하나의 대주제 아래 서로 다른 작가의 작품들이 모여 독특한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 혹은 전시를 보며 나만의 흐름을 만들 수도 있다. 파도가 모래 위 같은 패턴을 그리지 않는 것처럼, 모든 전시는 항상 새롭다.

  이후의 글에서부터는 한국(주로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들에 대해 내 생각의 경로를 소개하려고 한다. 현재 전혀 다른 분야의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데, 학위 과정을 밟으며 최근 몇 년간 거의 매주 주말마다 전시를 갔던 것 같다. 해외 학회를 다녀올 때도 항상 주위 미술관에 꼭 들리곤 했다. 전시에 대해 다양한 사람들과 서로 다른 감상을 공유하는 것도 좋아한다. 그렇게 전시 애호가가 되면서, 주위에서 어떻게 전시를 감상해야 하는지 물어보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사실 지금의 내가 미술관을 가거나 전시를 감상하는 일은 작품을 매개로 스스로와 대화하는 것과 같아서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과거의 내가 시와 미술이 어려웠던 것처럼 말이다. 전문적인 지식이 아니라 주관적 경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감상할 수도 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미술관에 대해 좀 더 쉽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사소한 기대가 있다. 앞으로의 글들을 보는 사람들이 누군가의 일기를 읽는 마음으로 읽어주면 좋겠다.




연재 정보
연재명내가 사랑하는 전시 공간의 공기를 소개합니다
연재 슬로건생각하는 공간의 무한한 확장과 변이, 그리고 자유로움.
연재 소개작품에서 파생되는 생각은 어디든지 도달할 수 있고 무엇이든 틀리지 않았다. 내가 전시에 빠져드는 경로를 기록하고 공유하기. 
하고 싶은 말
작가 정보
필명진경
작가소개검은색과 흰색 사이 줄다리기를 좋아합니다. 경계에 살며 경계 없는 세상을 그립니다. 가끔 획으로 생긴 틈으로 굴러 떨어지기도 합니다. 
작가의 말0과 1 사이 수많은 숫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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