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나는 있지, 워킹팜처럼 걷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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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익은 인생들을 위하여
[내가 사랑한 모든 것들이 나를 아프게 해요] 3회


덜 익은 아보카도(3)  
by 연수


  



  워킹팜이라는 나무를 알아?

  식물인데도 뿌리를 스스로 움직여 걷는대. 정말 신기하고 이상하지?

  아직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아. 누가 알았겠어. 이름도 모를 저 먼 땅에서 동물도 아닌 식물이 제 발을 움직여 걸어다니고 있을 줄을. 너와 내가 교집합을 이루지 않는 세상이 이토록 넓다는 사실이 내게 위안을 준다.

  그러나 사실 말이야, 너와 접점 하나 없는 어느 먼 외국의 이상한 식물마저도 결국 내게서 너를 꺼내고 말았어. 나는 있지, 워킹팜처럼 걷기로 했다.


  벌써 한 달이나 지나버린거지.

  엄마가 그랬어. 부모가 죽어도 사흘째엔 배가 고파온대.

  다 못 먹을 걸 알면서 치킨을 한 마리 시켜두고 맥주를 땄다. 사실 몇 조각 먹고 이미 입맛은 없어졌는데 꼭 자학하는 사람처럼 입에 치킨을 욱여 넣었다. 예언된 것처럼 속이 체했다.

  그래도 괜찮아, 내겐 무수히 긴 밤들만이 남았고 그곳엔 오롯이 나 홀로니까.

  아주 괜찮은 사람처럼 SNS에 일상을 올리고, 놀자고 부르는 친구들과 흥겨운 밤거리를 걷고, 해보고 싶었던 취미에도 도전한다. 빈틈 없이 모든 시간과 분을 무언가로 채운다. 괜찮아, 그건 쉬운 일이야. 골머리를 썩게 하는 회사 일들도 오히려 반갑지. 고민하고 애쓰면 풀리잖아. 너라는 관계와는 달리.

  그런데 있잖아, 얼마나 외로우려고 혼자 남은 이 길은 이렇게 넓고 이렇게 기나?

  얼마나 쓰라리려고 세상은 아직 이렇게 온통 너로 차있나.


  내 마음인데 내 마음대로 되지가 않아. 그렇지?

  고장난 항체처럼 감정이 멋대로 너를 들춰낸다. 깜빡이 켜지 않고 들어오는 쓰나미. 삶의 어느 순간에 들이닥쳐서 일상을 무너뜨려놓고 간다. 내가 원한 적 없는데도.

  밥을 먹다가 문득, 길을 걷다가 문득, 노래를 듣다가 하염없이, 그렇게 생각이 나다가. 샤워하는 물줄기에 무너져버렸다. 이유도 모르고 부서진 평온.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세상이 마구 요동친다.

  쏴아-

  물줄기는 쏟아지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어.

  나는 이대로 익사하는 걸까?

  나는 내내 네가 목말랐는데, 결국 너 때문에 익사를 한다니. 아이러니하게도.


  잠긴 물 속에서 웅크려 생각을 한다.

  지난 나의 사랑에 대해. 아니, 지금도 사랑하는 나의 사람에 대해.

  어쩌면 너는 단 한번도. 내 안에 자라고 있던 이 커다란 나무를 보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너에게서 싹을 틔워 이토록 울창하게 자라 파란 나뭇잎들을. 네가 이걸 봤다면 그렇게 외롭게 죽어가지 않았을 텐데. 사람의 피부가 불투명한 건 때로 슬픈 저주일지도 모른다.

  내가 네 속에 들어갈 수 있었다면 진작에 뿌리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물을 벌컥벌컥 마셨을까. 그래서 자리 뻗을 공간을 찾지 못하고 기형적으로 삐뚜룸해진 이 줄기가 곧고 바르게 너를 향해 피었을까.


  고칠 수 없는 역사로 남은 너와 나의 시간을, 나는 도무지 미워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깊이 뿌리내린 마음들이 좀처럼 뽑히지 않아. 그리고 사실, 이 울창한 나무가 나는 밉지 않아. 생채기 좀 있어도, 누렇게 뜬 잎이 좀 있어도. 구부정하게 무성한 잎을 피운 이 나무가 사랑스러워. 그래서 네게 보여주지 않은 나무를 영영 숨긴 채로 가슴을 잠그기로 했다.


  먼 길을 걸어가려는 마음으로 짐을 가볍게 싼다.

  내가 없는 미래의 네가 편안히 웃고 있을 것 같다는 간절한 예언만을 손에 쥐고 걷는다.

  덜 자란 아보카도에서 뻗어 나온 이 가느다란 뿌리가 너무나도 위태롭고 약하지만, 꼿꼿하고 처절하게 걸어보련다. 피워낸 나뭇잎이 다 영글어서 떨어지고, 썩고, 다시 물렁한 알맹이로 익을 때까지 걸어 가보련다.

  이 긴 외길 끝에서 우리, 만나지 말자.





연재 정보
연재명내가 사랑한 모든 것들이 나를 아프게 해요
연재 슬로건덜 익은 인생들을 위하여
연재 소개내가 사랑한 모든 것들이 나를 아프게 해도, 나는 끊임없이 사랑해야 할까요? 사랑한 모든 순간, 아파한 모든 순간의 향기가 이 글에서 느껴지면 좋겠습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어리석고 지혜로운 인간들의 동호회를 위하여.
하고 싶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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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명연수
작가소개아홉수, 덜 익은 인생을 사랑하는 법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사랑한 순간과 아파한 순간들을 기록해 볼게요. 
작가의 말내가 사랑한 모든 것들이 나를 아프게 해도, 나는 끊임없이 사랑해야 할까요? 
추가 정보
인스타그램@8u_palet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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