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지금 내가 쓰는 일기는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응원이자 사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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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넘게 기록해온 것들에 대한 새로운 기록
[기록의 기록] 4회


4화. 지금 내가 쓰는 일기는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응원이자 사랑인 것이다.  
by 사사이안



  누구나 일기를 써 본 기억은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 방학 숙제에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일기 쓰기였으니까. 아쉽게도 초등학생 때 쓴 일기장은 남아 있지 않지만,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조각들이 있다. 2000년대 초반, 여자아이들 사이에서는 '교환 일기'라는 것이 유행했었다. 아트박스 같은 팬시점에서 표지도 내지도 예쁜, 앙증맞은 싸구려 자물쇠가 달린 노트를 사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우정이 견고해지는 느낌이었다. 오늘은 내가, 내일은 네가 서로에게 보내는 편지를 가장해 일기를 썼다. 본명이 아닌 별명으로 서로를 부르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기를 쓰는 동안 상대방을 생각하고, 일기장을 교환하기 위해 매일 꼭 만나야 하는 일들은 지금 생각하면 꽤 낭만적이었던 것 같다. 낭만에 비해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학년이 올라가고,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해진 사춘기 소녀는 누구에게도 말하기 싫은 사소한 비밀들을 혼자만의 노트에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집채만 한 파도가 치고, 용암이 끓어오르는 시기였기에 선생님의 숙제 검사가 아니더라도 매일 일기장은 빈틈없이 메워졌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친구들과의 관계, 사소한 것에도 느낀 감상, 좋아하는 아이돌들에 대한 애정,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들에 대한 분노.. 풍부한 감정들이 뒤섞여 가장 날것의 언어들로 글을 써 내려갔던 시기였다. 일기를 쓰는 시간만큼은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었고 억눌려 있던 것을 해소할 수 있었다. 기질적으로 감정 기복이 심하면서도 타인에게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인지라 일기장이 나의 유일한 쉼터이자 친구였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질풍노도의 시기도 잠깐. 대학 입시와 대학 생활로 일기장은 내가 외면한 소원해진 친구가 되었다. 학창 시절만큼 매일 붙잡고 있지는 못하더라도, 매년 연말이 되면 신중히 다이어리를 고르고 '오늘은 일기 써야 하는데...' 라고 부채감을 갖는 것만으로 일기장과의 인연을 이어가려 했다. 어떤 해는 평범한 새해 다짐처럼 3개월 정도만 채운 일기장도 있었고, 어떤 해는 매일을 채우지 못하더라도 1년을 완주한 해도 있었다. 일기장이 쌓여가는 만큼 세월이 흘러감에도 실감이 났다.


  일기 인간으로 산지도 언 20년. 이제 일기 쓰기는 꽤나 멋지고 대단한 취미 취급을 받는다. 주변 사람들도 일기를 쓴다고 하면 '정말 부지런하시네요, 저는 어렵던데..' 라는 말이 제일 먼저 나온다. 흔한 자기계발서의 단골 멘트는 '기록하라' 이며, 글쓰기의 기본은 일기 쓰기라고 많은 작가가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듯 일기 쓰기는 어렵고 고단한 일이기도 하다.  하루의 끝에 시간을 내어 하루를 돌아보고, 나를 곱씹는 시간. 생각보다 많은 집중력과 정성을 쏟아야 한다. 단순히 오늘 무엇을 했는지 쓰는 것만 해도 아무런 외부의 개입 없이 온전히 집중하는 정신이 필요하다. 또, 대단히 성과가 잘 보이거나 빠르게 나타나는 일이 아니다. 오롯이 나만의 만족이며 작은 기록들이 모여 큰일을 이루기엔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어쩌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단순히 '좋은 일'이기 때문에 덮어놓고 따라 하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강력한 동기 부여가 필요한데 나에게는 '기억의 소멸'이 가장 큰 동기였다. 인간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고, 믿을 것은 그때의 내가 남긴 흔적뿐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한다. 어느 유명한 애니메이션의 대사처럼 '기억하는 한 영원히 살아있다'를 반대로 말하면 '기억하지 못하면 사라지는 것과 같다'라고 생각한다. 이미 지난 기록들을 더듬어 나에게 쓸모가 되었을 때는 이러한 소신을 더욱 견고히 하는 일이 된다.

  오늘도 나는 짧은 일기를 썼다. 반복되고도 잔잔한 일상이지만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를 다르게 느낄 수 있는 건 일기 덕분이다. 일기는 잠시 소원해진 친구를 넘어 이제 서로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편안한 오랜 친구가 되었다. 언제든 내가 넘어지고 늪에 빠져 허우적댈 때, 일기장을 통해 건너온 과거의 내가 나를 일으켜 세워줬으면 한다. 지금 내가 쓰는 일기는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응원이자 사랑인 것이다. 







연재 정보
연재명기록의 기록
연재 슬로건10년 넘게 기록해온 것들에 대한 새로운 기록 
연재 소개'기록 인간'으로 살아오게 된 시간들에 대하여, 결국 '쓰는 것' 까지 도달한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다시 씁니다.
하고 싶은 말저의 기록이 당신의 삶에 닿아 새로운 기록으로 쓰여지는 기적이 이루어진다면 좋겠습니다.
작가 정보
필명사사이안
작가소개독립출판 시집 『다시 오지 않을 밤과 바람』을 썼습니다. 무엇을 찾는지도 모르고 무언가를 찾고 있습니다.
작가의 말천천히, 기쁘게, 씁니다.
추가 정보
인스타그램@sasa_ian
블로그https://blog.naver.com/qlfn8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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