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달리 뾰족한 수는 없으니 우리 그냥 사이좋게 지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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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걸음마
[집순이의 방 탈출] 4회


정답은 없지만 정답게   
by 백유주



  나는 지폐 한 장을 쥐고 무작위 자판기 앞에 서 있다. 주머니 속에 오래 구겨져 있느라 꼬깃꼬깃하고 군데군데 찢어진 낡은 지폐를 조심스럽게 자판기에 넣고 버튼을 누르면 덜컹, 맛을 가늠할 수 없는 미지의 캔이 떨어진다. 때로는 달콤하고, 때로는 씁쓸하고, 때로는 알싸하며 때로는 시원하다. 몸을 녹여주는 따뜻함이 필요할 때 마침 핫초코가 나와주기도 하고, 갈증이 단숨에 달아날 만큼 톡 쏘는 콜라이길 바랐는데 미지근한 보리차가 나와버릴 때도 있다.


  어떻게 지냈냐는 평범한 안부 인사가 마치 기말고사에 받아본 시험지 속 문항처럼 어렵고 막막하고 부끄럽다. 하지만 이런 거 배운 적 없다는 얼굴로 처량하게 쳐다본들 힌트 같은 것 나올 리 없지. 뒤죽박죽 꺼내놓는 대답들. 그 앞에 반응은 제각각이다.


  나 : (한숨 일발 장전) 내가 흘려보낸 시간을 차라리 너한테 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A : (눈물 일발 장전) 그걸 왜 허송세월이라고 생각해? 다 성장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었던 거야. 그렇게 말하지 마. 슬프잖아.


  B : (박수 일발 장전) 그러니까! 그 시간 나한테 줬으면 내가 아주 그냥 기가 막히게, 야무지게, 재미나게 잘 썼을 텐데. 아깝네.


  이토록 극명한 차이라니. 랜덤 자판기에서 튀어나오는 각기 다른 대답을 수집하면서 우리는 정말 모두 다 다르다는 당연한 사실을 체감한다. 그럴 때마다 결국 질문을 던지고 만다. 편견에도 유행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콧대 높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구를 비집고.

“너, MBTI가 뭐야?”


  때로는 그 사람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의외의 면을 발견하기도 한다. 참지 않는 말티즈처럼 할 말 다 하고 언제나 똑 부러지는 씩씩한 사람인 줄 알았던 A는 알고 보니 눈물도 걱정도 많고, 자기 주먹이나 깨물고 있는 여리고 말랑한 솜뭉치 같은 인간이다. B는 뒷짐 진 어르신처럼 과묵하고 정적이라 생각했는데, 세상 바쁘고 활동적인 하고재비(이것저것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을 일컫는 경상도 방언)로 헤르미온느형 인간이다.


  이렇게 새롭게 사람들에 대한 정보가 하나씩 쌓여가는 중이다. 만나지 못한 시간 동안 조금 변한 모습, 그동안 내가 미처 잘 알지 못하고 있던 성격, 어쩌면 멋대로 규정하고 오해한 부분들까지. 마치 인간관계 시즌 2에 점 찍고 돌아온 듯한 친구들. 그들에게도 내가 그렇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수많은 질문과 대답. 뒤섞여 떨어지는 물음표와 느낌표. 누구의 뜻대로도 가지런히 쌓을 수 없는 혼돈의 테트리스지만,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를 보여주고 ‘너’를 들여다보며 소통하고 있다. 우리는 닮은 듯 다르고 다른 듯 닮았다. 인생은 골머리를 앓게 복잡하고도 어이없을 만큼 단순하다. 달리 뾰족한 수는 없으니 우리 그냥 사이좋게 지내볼까? 정답은 없지만 정답게.


  나는 당신의 언어 속에 담긴 맛과 영양을 꼭꼭 씹어 잘 소화해 보려고 한다. 각양각색의 눈빛과 말투와 몸짓을 뜯고 맛보고 즐기며 몸도 마음도 조금씩 더 튼튼해지도록. 가끔 의도치 않게 뼈와 가시가 잇몸을 찌르기도 하지만, 너무 놀라지 않고 요리조리 움직여 적당히 잘 발라내 가면서. 그러니까 핫초코도 보리차도 콜라도 맹물도 모두 환영!





연재 정보
연재명집순이의 방 탈출
연재 슬로건다시 걸음마
연재 소개지독한 집순이가 도돌이표를 탈출하고자 꺼내든 작은 용기입니다.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바깥을 흘깃거리는 모습을 지켜봐 주세요.
하고 싶은 말말을 걸어볼게요. 같이 걸어볼까요?
작가 정보
필명백유주
작가소개지구본 모양 연필깎이로 연필을 깎아요. 몇 번의 세계 일주로 튼튼한 목발이 되죠. 목발을 짚고 두리번두리번 세상을 짚어보고 있어요.
작가의 말이불을 개면 날이 갤지도 몰라요.
추가 정보
인스타그램@iooy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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