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빛을 보면 재채기처럼 튀어나오는 혼잣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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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어진 단단한 과일의 속을 봐 보자
[단단한 과일의 껍질을 끊임없이 한 줄로 자르기] 4회


냉장고 맨 아래 서랍은 신선칸
('방치' 그 뒤에 남은 이야기)  
by 포포사




  어떤 도둑은 흔적을 숨기지 않는다
  다만 지금을 벗어나기 위해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줄일 뿐
  -
  사진 한 장을 찾기 위해
  온종일 서랍을 헤집는 날이 있지

  빠르게 모든 서랍을 열기 위해선
  맨 아래 서랍부터 열어야 한다
  그러면
  열었던 서랍을 다시 닫는 낭비를 줄일 수 있다

  그렇게 모든 서랍을 헤집어 봐도
  사진 한 장 찾지 못하는 날이 있고
  이젠 어떻게 해야 하나
  서랍장 앞을 한참 서성이다
  결국
  도둑인 내가 경찰인 나에게 붙잡혀
  집에만 갇혀 있는 날이 있다

  헤집어놓은 서랍장이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처럼 보이는 날이 있다

  내가 갇힌 집, 이곳에는
  가만히 숨소리만 내는 냉장고가 있고
  냉장고는 가장 오래 머문 모범수이다

  어떤 믿음으로, 또는 소망으로, 아니 사랑으로
  살아가야 하나요 냉장고에게 묻기 위해
  등 하나 켜지 않은 방에서
  최소 동선으로 걸어가는 초범이 있다

  냉장고가 힘겹게 입을 열자 쏟아지는 빛이 있고
  누가 넣어 놨나요 상할 리가 없는 빛을
  빛을 보면 재채기처럼 튀어나오는 혼잣말이 있다

  어둠 속에선 
  반갑다 말하지 못하고
  표정을 찡그린 날이 많았는데

  조금 서늘해진 집에서
  차갑다, 나를 떠난 사람아
  내 안을 채운 가장 차가운 빛이
  당신이었단 걸 깨닫는 날이 있다

  또 무엇이 남아있나요
  갱생하지 못한 도둑처럼
  시선이 아래로 향했을 때

  냉장고 맨 아래 서랍에
  바나나를 넣어놓은 사람이 있었다 



연재 정보
연재명단단한 과일의 껍질을 끊임없이 한 줄로 자르기
연재 슬로건내게 주어진 단단한 과일의 속을 들여다보기
연재 소개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따금 누군가가 방문해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
작가 정보
필명포포사
작가소개주머니시 작가
작가의 말내가 하고 싶은건 단지
단단한 과일의 껍질을 끊임없이 한 줄로 자르기
추가 정보
인스타그램@poposa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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