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삶을 돌아봤을 때 나는 천천히, 쓰면서, 기쁘게 살아왔다. 그중 쓰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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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넘게 기록해온 것들에 대한 새로운 기록
[기록의 기록] 1회


1화. 기록형 인간의 탄생
by 사사이안




  내 본명을 한자로 풀자면 '천천히 쓰는 기쁨' 이다. 노래가 노래 제목 따라가듯, 사람도 이름을 따라가는지 30년 가까운 삶을 돌아봤을 때 나는 천천히, 쓰면서, 기쁘게 살아왔다. 그 중 쓰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1. 먼저 쓰는 자가 있었다

  시작은 그랬다. 책장 가득히 꽂혀있던 것 중 일부는 더 두꺼워질 수도 없을 정도로 두꺼워진 노트들이었다. 그리고 어린아이는 그 노트를 보며 자랐다. 단순히 꽂혀있는 노트를 바라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의 어머니는 끊임없이 노트를 채워갔고 새로운 노트를 구입했고, 책장을 채워나갔다. 어머니는 넉넉지 않은 살림을 효율적으로 꾸려가기 위해 가계부를 쓰셨다. 바래져 사라질 걸 알면서도 영수증은 꼭 챙겨 붙이셨고, 아무리 긴 영수증도 손수 손으로 항목들을 옮겨적으셨다. 언제든지 언제 무엇을 샀느냐고 물으면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이따금 어머니는 자신의 학창 시절 썼던 노트를 보여주시곤 했다. 으레 그 시대의 소녀들이 그러하듯 낭만적인 시로 가득한 노트였다.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이 노트들을 버리지 않고 있었던 건, 너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고. 그 시들은 70년대 한 소녀의 마음도 흔들고, 2000년대 한 소녀의 마음도 흔들었다. 다 자란 딸은 또 이렇게 스스로를 위해, 자기 자식을 위해 새롭게 쓰고 있으니. 

  어머니는 쓰고 또 쓰셨다. 저녁을 먹은 뒤 하루를 마무리하며 쓰는 가계부는 물론이고, 다른 것을 또 쓰기 시작하셨다. 어느 정도 자란 두 아이와 함께 가족은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했다. 5분 거리에 마침 도서관이 있는지라, 어머니는 딸들과 함께 일주일에 한 번씩 책을 빌리고 보는 것을 필수 일과처럼 만드셨다. 딸은 만화책을, 당신은 관심 있었던 요리와 건강 책을 빌리셨고 그것을 또 쓰기 시작하셨다. 지금처럼 휴대전화를 몇 번 두드리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정보가 나오는 시절이 아니라서 어머니는 새로운 요리의 레시피를, 당뇨에 좋다는 음식들을 손수 적으시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사하면서 여유로워진 책장은 다시 어머니의 독서 노트로 채워져 갔다. 

  어머니가 책을 읽고 그것을 자신의 노트에 베껴 쓸 때면, 아이는 자연스레 앉아서 책을 읽곤 했다. 그리고 쓰곤 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로.



  2. 쓰기의 시작

  인생을 바꿀만한 것들은 의외로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주 사소하게 다가오는 듯하다. 나에게 첫 스케줄러가 그랬다. 

  15살이 된 생일, 동생이 선물이라고 준 것은 빨간 스케줄러다. 초등학생 용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동네 문구점에서 살 수 있는 노트뿐이었겠지. 별 감흥 없이 선물을 받아 든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날짜를 채워나갔다. 처음은 아주 가벼운 시작이었다. 이 종이가 끝날 때까지 날짜를 색색으로 채워 넣고, 부모님 생일을 적어넣고 좀 들고 다녀 보니 숙제도 좀 적어보고.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 생일도 적어볼까? 친구들 생일도 궁금한데, 친구들 생일도 물어봐서 적어야지. 하다 보니 썩 맘에 드는 것이었다. 꼼꼼히 스케줄을 관리하는 듯한 나 자신도, 아기자기하게 적힌 내 스케줄러도. 채 1년도 못가 스케줄러의 종이는 동이 났고, 새로운 스케줄러를 고르던 그때부터 나는 기록의 '실행'에 발을 들였다. 대충 지나쳤던 다이어리 코너는 내가 가지고 있는 스케줄러보다 더 이쁘고, 더 갖고 싶은 것이 많았다. 지금은 이걸 사지만 다음엔 저걸 사봐야지, 그러려면 이걸 얼른 다 써야지. 하는 두근거림이 또 촉진제가 되었다.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쓰기 시작한 나의 기록은 가사 필사집, 책 구절 필사집, 낙서 연습장, 비밀 다이어리, 가계부 등등으로 확장되다가 일상으로 녹아들었다. 그렇게 10년이 넘게 쓰고 쓰는 일상을 반복했고 나는 매년 12월을 기다린다. 내년을 다시 채울 다이어리를 고르기 위해.





연재 정보
연재명기록의 기록
연재 슬로건10년 넘게 기록해온 것들에 대한 새로운 기록 
연재 소개'기록 인간'으로 살아오게 된 시간들에 대하여, 결국 '쓰는 것' 까지 도달한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다시 씁니다.
하고 싶은 말저의 기록이 당신의 삶에 닿아 새로운 기록으로 쓰여지는 기적이 이루어진다면 좋겠습니다.
작가 정보
필명사사이안
작가소개독립출판 시집 『다시 오지 않을 밤과 바람』을 썼습니다. 무엇을 찾는지도 모르고 무언가를 찾고 있습니다.
작가의 말천천히, 기쁘게, 씁니다.
추가 정보
인스타그램@sasa_ian
블로그
https://blog.naver.com/qlfn8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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