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나는 눈이 내리는 나라에 살았던 이방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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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어떤 관계는 그저 우리의 섣부름만을 증명하곤 한다.
[섣부름, 미숙함] 1회


적도의 겨울
by 소연




  매년 겨울 적도 근처 뉴올리언스에는 가짜 눈이 내렸다. 눈이 존재하지 않는 적도의 겨울에서 남몰래 눈을 그리워했을 누군가의 기획이었다.

  내가 그곳에 머무르던 겨울, 뉴올리언스에는 9년 만에 눈소식이 있었다.


  플로리다에서 태어나 뉴올리언스로 대학을 온 J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눈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진눈깨비가 내리던 날 이게 눈이야? 묻던 무지의 눈동자. 나는 그 시선이 생소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쌓이지도 않는 눈을 긁어모아 손보다 작은 눈사람을 만들어 기숙사 앞에 놓던 J. 나란히 놓여있던 비슷한 크기의 눈코입이 없는 눈사람들. 선분홍의 꽃과 눈사람이 공존하던 이질적인 겨울의 풍경. 적도 근처에 놓인 도시의 겨울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 아이는 눈을 모른다. 


-


  서울에 눈이 내리지 않은 지 십오 년이 지났다. 나의 기도가 특별한 효력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믿지는 않으나 눈은 기척도 없이 사라졌다.

  눈이 사라지기 전 마지막 겨울에는 도로 제설을 했다. 눈은 휴일을 모른다. 기상청이 눈 예보를 내보내면 우리는 어김없이 사무실로 모여들었다. 지루한 염화칼슘 상차 작업이 끝나면 각자에게 할당된 도로를 돌며 살포 작업을 묵묵히 해냈다. 제설 삽날기를 설치한 덤프트럭은 낡았고, 안전벨트는 고장 나 있었다. 거대한 몸집의 차 안에서 우리는 속절없이 덜컹거렸다. 고작 덜컹거리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 겨울은 유독 눈이 많이 내렸다. 두 달 동안 열세 번의 비상근무를 선 후에 우리는 눈 예보가 보이면 치를 떨었다. 그 누구도 선택해서 하는 일이 아니었다. 삶의 막다른 길이었다. 자주 뜬눈으로 밤을 새웠고 새벽에도 호출을 받고 도로로 내쫓겼다. 

  염화칼슘 결정이 도로를 주행하던 차에 흠집을 내면 보상금 지급 민원에 휘말렸다. 소송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선탑을 하지 않는 날에는 변호사를 만났다. 아니요, 과실 비율이 낮고 높은 게 문제가 아니라 1%라도 과실이 인정되면 안 된다니까요, 선례로 남으면 전국 공공기관들이 다 피해를 본다니까요, 뒤에 차량이 있을 때마다 제설기를 끄면 도로 제설을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세요? 제설차가 신호 대기 중이었거나 유턴을 하려던 것도 아니고 정상 주행 중이었다니까요, 블랙박스 영상 보셨어요? 뒤 차가 거리 확보를 하는 게 맞는 거잖아요. 제설차를 대변하기 위해 자주 목소리를 높였다. 옳은 일이라고 믿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그래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눈이 사라지게 해 달라는 기도는 우리의 작고 사소한 반항일 뿐이었다.


*

  있지, 사실 나는 남몰래 눈을 좋아했다. 가끔은 눈을 기다렸다. 눈은 어땠더라. 눈은 알몸으로 나를 끌어안았다. 눈이 오면 내가 어린아이가 되는 것 같았다. 손에 내려 앉은 눈송이가 녹기 전 찰나의 순간 눈의 결정을 탐했다. 눈이 쌓인 놀이터에 누워 천사를 흉내 내거나 시린 손을 견디며 눈사람을 만들기도 했다. 작은 돌을 주워 눈을 만들고 꺾인 나뭇가지를 주워 팔을 만들었다. 목에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망설임 없이 눈사람에게 내어 주었다. 눈으로 만든 사람, 사람은 아니지만 사람의 형태를 한 것들을 내 손으로 빚어내곤 했다.

  문득 시선 끝에 내가 낳은 아이가 걸린다. 세상이 궁금증으로 가득한 여섯 살의 아이가 나를 보고 있다. 아침에 양 갈래로 땋아준 머리는 이미 다 망가뜨린 채 온 얼굴로 환히 웃는 아이. 눈을 감각해 보지 못한, 눈썰매를 타보지 못한, 눈사람을 만들어보지 못한 아이. 겨울이라는 계절과 눈이라는 단어가 맞닿아 있음을 모르는 아이.

  유치원에서 색종이와 가위로 눈의 결정을 만드는 놀이를 하고 온 날, 아이는 자신이 오려 만든 눈 결정 모양의 색종이를 소중히 꺼내 보였다. 아이의 사전에 '눈'이라는 단어가 피어난 날이었다. 호기심의 눈동자. 당연하게도 아이의 모든 '첫' 순간에 얼마쯤의 책임을 느끼는 나.

  불현듯 아이에게 눈을 보여주고 싶어졌다. 충동적으로 유리 구의 입장권을 끊었다.


-


  나라는 사라진 것을 추억하기 위해 압도적인 크기의 유리 구를 만들었다. 우리가 겨울이라고 부르는 석 달 동안 유리구 안에는 매일 인공의 눈이 내렸다. 찬 공기가 볼을 스치고 속눈썹에 눈송이가 내려앉는다. 낯선 감촉, 차갑게 피부에 닿았다가 금세 녹아버리는. 어느 날에는 나의 사랑이었다가 어느 날에는 나의 증오였던 눈. 나에게는 애틋함이었고 아이에게는 호기심이었을 눈. 유리구 내부는 눈을 그리워하는 어른들과 눈을 처음 보는 아이들로 북적였다. 인파 속에서 아이를 잃어버리지 않으려 아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지나온 세월에서 이미 많은 것을 잃었다는 감각은 가슴 구석의 통증으로 오롯이 남아 있었다.


  “엄마, 이게 눈이야?”

  코끝이 빨개진 아이가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무지의 눈동자. 적도 근처의 나라에 사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눈이 내리는 나라에 살았던 이방인이 될 것이다.




연재 정보
연재명섣부름, 미숙함
연재 슬로건가끔 어떤 계절은 그저 우리의 섣부름만을 증명하곤 한다.
연재 소개사랑해 마지않았던, 그렇지만 끝내는 섣부름과 미숙함으로 기억되는 순간을 기록합니다.
미숙함에서 비롯된 슬픔마저도 모두 나의 시간이었기에.
하고 싶은 말당신은 어떤 미숙함의 시간을 지니고 있나요?
작가 정보
필명소연
작가소개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생각들이 활자로 기록되는 순간을 사랑합니다. 
생계를 위해 사랑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작가의 말기억을 사랑하고 기록을 신뢰합니다. 
추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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