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가 하고 싶은 건 단지 단단한 과일의 껍질을 끊임없이 한 줄로 자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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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주어진 단단한 과일의 속을 봐 보자
[단단한 과일의 껍질을 끊임없이 한 줄로 자르기] 1회


지구깎기
by 포포사





1. _ ㅡ \ / ㅡ _

  오지 않은 사람들을 기억하려다
  왔던 사람들을 다 잊어버렸다

  나는 잎을 다 소진한 나무처럼 병원 침대에 누워있고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이곳의 사람들은 수액이 떨어지기 전에 교체를 한다
  자고 일어난 머리맡엔 누군가 놓고 간 과일바구니가 있다

  병원 밥은 맛이 없어
  그리고 과일은 과일

  밥 대신 먹기 쉬운 과일들은 다 먹었다
  겨울철이라 귤이 많았는데
  자르지 않은 손톱이 잘 들어갔다

  병실의 가습기는 항상 적정 습도를 유지하고
  입원자들은 일일연속극을 보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밤에 사과가 먹고 싶어서 바구니에서 하나 꺼내
  입고 있는 환자복에 사과를 쓱쓱 닦았다
  옅은 소독약 냄새가 났다

  일일연속극의 인물들처럼 악착같이 살자는 마음으로
  사과를 베어 물었는데
  사과에 찍힌 치열이 엉망이어서
  한동안 엄지손가락을 입에 넣고 다녔다

  손가락을 빠는 아이가 왜 울지 않는지 알게 되었다


2. 병문안

  과일바구니를 들고 찾아온
  문안객을 직접 대면한 건 처음이었다
  아뇨 지난주에도 찾아왔었어요 기억 안 나세요?
  그가 말했다

  처음 보는 그와(물론 내가) 잠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그러면 퇴원하면 뭐가 제일 하고 싶어요?
  파도가 맛있는 카페에 가고 싶어요
  꼭 갈 수 있을 거예요 지구는 땅보다 바다가 더 넓으니까
  말을 마친 그가
  한 손에 과일바구니를 들고 온 그가
  다음 약속이 있다며
  목도리를 매면서 일어났다

  혹시 다음에 올 땐 칼을 가져와 줄 수 있나요?
  받은 과일을 깎아야 하는데
  그에게 물었는데
  저는 당신을 살리러 오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가 답했다
  과일바구니를 들고 병문안을 오는 게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면 뭐냐고 물으려다 말았다

  내가 하고 싶은 건 단지
  단단한 과일의 껍질을 끊임없이 한 줄로 자르기,
  깎은 과일을 엄지와 검지로 지구본처럼 들기,
  멍든 부분을 보조개처럼 도려내기

  사실 껍질에도 영양분이 많은 거 당신도 알고 있죠?
  그가 사과를 집어 입김을 불고
  겉옷의 단추를 풀어 속에 입은 니트에
  사과를 문질러 나에게 건넸다
  그에게선 시원한 섬유 유연제 냄새가 난다

  지구는 중심부를 향해 사과를 끌어당기고
  사과는 바닥에서 멈춘다

  운석 하나가 지구에 떨어진 기분이 들었지
  만약 지구가 견딜 수 있다면
  바다는 더 넓어질 것이다

  밑질 것이 없었다
  종말도 나쁘지 않았으니까


3. 동종요법

  병실에 남아 생각했다

  껍질에 영양분이 많다고 말하는 사람은
  얼마나 대단한 껍질을 가지고 있을까
  또 그 심장에는 씨가 몇 개나 있을지

  뼈가 안 좋은 사람은 사골을 고아 먹고
  눈이 안 좋은 사람은 생선 눈알을 파먹어요

  다음 주에도 찾아오시나요
  당신의 심장을 껍질째 통째로




연재 정보
연재명단단한 과일의 껍질을 끊임없이 한 줄로 자르기
연재 슬로건내게 주어진 단단한 과일의 속을 들여다보기
연재 소개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따금 누군가가 방문해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
작가 정보
필명포포사
작가소개주머니시 작가
작가의 말내가 하고 싶은건 단지
단단한 과일의 껍질을 끊임없이 한 줄로 자르기
추가 정보
인스타그램@poposa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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