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7] 내가 나를 속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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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시 시제품 배포-배포 편 



  주머니시를 하는 동안 제가 누군가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면, 그 말은 누구도 아닌 제가 한 말일 거예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일인데요. 그래서 내가 나를 의심하는 경우도, 내가 나를 속이는 일도 있죠. 하지만 그 일이 반드시 나쁜 일 만은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은 오늘의 이야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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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머니시 시제품 배포 목표 일정은 대학의 새 학기 시즌이었습니다. 유동 인구가 가장 많을 때면서, 가장 즐거운 시기라는 생각이 들어서 정했는데요. 어쩌면 괴상하다고 할 수 있을 이 제품 마저 사람들이 재미있게 봐줄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일정이 다가오는 중에도 불행히도 종이를 마는 기계를 발굴하지도 개발하지도 못했습니다. 알면 알수록 기획 만으로 될 수 없는 일이란 걸 깨달아야 했죠. 그렇다고 종이를 일일이 손으로 말 수도 없는 일. 그래서 대체 방법으로 종이 접기를 생각했습니다. 정사각형의 종이를 두 번 접으면 담뱃갑 안에 알맞게 들어갈 만한 비율의 종이가 되더라고요. 쉽게 말해 껌과 같은 형태로 말예요. 

  종이를 자동으로 접어주는 접지기*를 구했습니다. 테스트 해보니 아주 알맞게 만들 수 있겠더라고요. 그 다음부터는 생각보다 순탄했습니다. 박스 안에 접어 넣을, 정사각형으로 재단된 인쇄물들도 모두 받았고요. 투박하지만 귀여웠던 시거랫 그리고 비타민시 박스패키지도 받고, 나무를 직접 조립해서 만든 진열대까지 정말로 모든 게 준비되었어요. 

  목표 배포량은 총 4000개, 목표 배포 기간은 총 열흘이었으므로 하루 400개 꼴로 배포해야 했는데요. 그 시절 팀원이었던 미리암 작가와 ERICA와 서울캠퍼스를 나눠 각자 200개씩 지나가는 학우들에게 나눠주었죠. 다만, 문제는 배포할 400개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 매일 8000개의 종이를 접어야 했던 일입니다. 종이를 말던 때 보다야 훨씬 빨라졌지만, 그래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그 기간의 하루 일정은 이랬습니다. 오전 6시 기상 후 사무실에 들러 짐을 챙기고, 7시 쯤 버스를 타고 8시 30분 쯤 한양대에 도착했습니다. 배포를 마친 후 귀가 하면 대략 오후 1시. 오후 5시 경 재 출근하여, 400개 제작하면 새벽 2시에서 3시. 그리고 다시 6시 기상. 이렇게요.

  정말 피곤했고요. 어떤 날은 밤을 새고 가기도 했습니다. 매번 들고 가는 짐을 마땅히 둘 데가 없어, 품에 안고 턱을 괴고서 한참을 졸며 갔던 기억도 있고요. 또 한 번은 제 시간에 못 만들어 ‘큰일이다’ 하고 있는데 비가 한참 쏟아져 안도한 적도 있었죠. 

  그렇게 힘든 기억이었음에도 주머니시의 다음을 생각할 수 있었던 건, 그 때 주머니시를 받은 분들의 반응 때문이었어요. 참 신기하고 재밌다면서, 왜 담배 형태로 만들었는지 물어보시는 분들도 많았죠. 다음 날 친구들과 함께 오는 분들도 계셨고요. 그땐 무슨 오기였는지, 매일 다른 작품**으로 시제품을 만들었는데요. 그러니까 제가 오기를 기다려 매일 받아가시는 분도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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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를 떠올릴 때면 참 제대로 속았단 생각을 합니다. 그만큼 기쁘지 않았다면 주머니시 안 했을텐데. 덜 고통 받았을 텐데. 그 생각을 지난 팬데믹 시간 동안 내내 했죠. 어쩌면 최근까지도. 

  그러다 최근 이집트 전문가 곽민수 소장***님의 인터뷰 영상을 접했는데요. ”자기 합리화로 버티고, 자기 객관화로 나아간다.” 라는 소장님의 말씀이 정말 인상 깊었어요. 그리고 기뻤습니다. 제가 속았다고 생각했던 시간조차 이 일을 지속할 수 있는 에너지가 되어준 것 같아서요. 또 한 번 속았으니, 두 번 더 속을 수 있다는 배짱도 생기고요? 

  이 모든 게 과분한 행운이라 생각하면서도, 나 같은 바보 아니면 누가 했나 자랑스러워질 때가 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처럼요.

  배포 직전 한양대 서울캠퍼스에 방문하여 장소 대관 위치를 확인하던 날, 캠퍼스 꼭대기에서 서울의 야경을 바라본 게 갑작스레 기억나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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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4용지에 적합한 것이라 시제품에 넣을 종이를 접는 데에는 다소 말썽이었다.

**열흘 간 총 200개의 작품을 소개했다.
***애굽민수로도 유명하다. 


[사진 설명]
1. 주머니시 시제품 진열 사진

2. 종이 접지기
3. 시제품 내부 형태
4. 한양대 서울캠퍼스 사회과학관 앞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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