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화서』 의 여러가지 말

봄놀다
2023-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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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서'란 꽃이 줄기에 달리는 방식을 가리켜요. 순우리말로 '꽃차례'라 하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성장이 제한된 '유한화서'는 위에서 아래로, 속에서 밖으로 피는 것이고(원심성), 성장에 제한이 없는 '무한화서'는 밑에서 위로, 밖에서 속으로 피는 것이에요(구심성). 구체에서 추상으로, 비천한 데서 거룩한 데로 나아가는 시는 '무한화서'가 아닐까 해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다 끝없이 실패하는 형식이니까요.


1

시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에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버리면 그 전제를 무시하는 거예요.


63

말의 본래 뜻에 사로잡히지 마세요. 그렇다고 모호한 문장을 쓰라는 건 아니에요. 시의 모호함은 의미의 모호함이지 문법적 모호함이 아니에요.


71

그냥 머릿속에 지나가는 생각들을 적어보세요. 쉽게 쓰는 것이 지름길이에요. 거창하게 인간의 운명에 대해 얘기할 것 없어요. 그런 건 내가 안해도 벌써 다 나와 있어요. 그냥 우리 집 부엌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만 쓰세요.


86

'아주머니 속에 주머니가 있다' 이런 식으로 말을 벗겨보세요. 주머니 속에는 또 머니가 있지요. 그러니까 아주머니의 주머니에 돈이 있다는 거잖아요. 이렇게 양파 껍질 벗기듯이 벗기다 보면 나중엔 아무것도 안 남아요. 시는 대상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거예요.


89

어떤 비유든 의미를 재생산해야 해요. 비유가 뒷북치면 안 돼요. 너무 빛나는 비유는 쓰지 마세요. 지루한 아름다움을 이야기 할 수 있어야 승리하는 거예요.


95

'햇빛이 빛난다' 이건 사구예요. '햇빛이 울고 있다' 이러면 활구에 가까워요. 활구에는 언제나 말의 각이 있어요. 행과 행 사이에도 각을 세울 수 있어요. '햇빛이 울고 있다. 어디서 본 얼굴이다.'


150

칼국수에는 칼이 없다 하듯이, 시가 있을 거라 생각되는 곳에는 시가 없어요. 지금 장사 잘되는 분야에 뛰어들면 곧 망할 가능성이 많아요. 제 엄마 말 지독히 안 듣는 청개구리처럼 해야 해요. 누가 뭘 말해도 믿지 말고, 항상 반대쪽으로 가세요. 그래야 희망이 있어요.


209

번역도 해석도 안 되고, 그렇다고 던져버릴 수도 없는 게 시예요. 그래서 시는 읽고 또 읽을 수 있는 거예요.


239

시는 말하는 게 아니라, 말을 숨기는 거예요. 혹은 숨김으로써 말하는 거예요. 슬픔을 감추는 것이 슬픔이에요. 슬픔에게 복수하려면, 슬픔이 왔을 때 태연히 시치미를 떼야 해요. 그것이 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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